본문 바로가기

오늘의 독서

가벼운 점심 | 장은진 소설집 | 어떤 것에 더 이상 흥미와 미련이 없다는 건 성장일까 권태일까



p. 22
아직 뚜렷한 형태를 갖추지 않은 아기는, 커더란 점으로 흑회색 부채꼴 안에 떠 있었다. 아기는 작은 잠수함 혹은 우주 캡슐 안에 담긴 것 처럼 보였다. … 어쩌면 저 작은 ‘한 점’에게 그 곳은 망망한 바다이자 광대한 우주일 것이다. 흑회색의 거친 질감 때문인지 처음 윤주가 사진을 건넸을 때 아기는 몹시 외로워 보였다. 아무도 없고, 아무도 다가갈 수 없는 어두운 곳에 갇혀서 혼자 밥을 먹고 잠을 자며 지내는 ‘한 점’ 사람의 외로움 사람은 시작부터가 외롭구나. 고독과 암흑 속에서 살아가는 구나. …녀석은 거친 바다와 우주를 제 영역으로 만들어가며 나와의 거리를 조금씩 좁히고 있었다. 모두가 그렇게 생겨나는 것이고, 그렇게 생겨났던 것이다.


p. 27
“너희 엄마는 다혈질인 데다 급한 성격이지만 현명한 사람이기도 하지. 나이를 먹으면 경험하지 않아도 이해되는 것들이 있으니까. 어떤 일에 충격을 덜 받기도 하고 누군가 죽더라도 잘 견디기도 하잖니. 나이가 사람을 단단하게 만들고 무디게 해.” 그건 어머니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말 같았다. 당시 어머니는 이미 나이가 많았다.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에도 한계가 있기 마련일까.

p. 35
돈을 벌고,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여 산다는 것의 의미가. 내가 어떤 멋진 생각과 올바른 행동을 해도 그 안에 영양분이 쌓이지 않아서 아무것도 자라지 않을 것 같았다. 맛있는 걸 먹고 좋은 책을 읽는 시간들은 어디에도 흔적이 남지 않을 거라는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무모하다 하겠지. 이기적이고 어리석은 선택이었다고 하겠지. 그래도 난 현재에 만족하고 후회하지는 않아.” … “난 내 삶을 살고 싶다. 그때로 돌아가도 똑같은 선택을 할 거야. 아무리 손가락질하고 비난해도. 사는 거 같거든. 밥도 맛있고 물도 맛있는 삶이면 된 거 아니겠니. 잠을 잘 자면 괜찮은 인생 아니겠니.” 아버지가 숨을 가다듬었다. “다만 가슴 한쪽에 미안함을 품고 내가 선택한 삶이 불행해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해.”

p. 76
진아는 피아노에 대한 관심이 사라진 것 같았다. 무엇이 흥미를 사라지게 했을까. 남자는 마치 진아의 뜨거웠던 하 시절이 완전히 끝나버린 걸 목도한 느낌이었다. 어떤 것에 더 이상 흥미와 미련이 없다는 건 성장일까 권태일까. 근데 왠지 남자는 그런 진아가 부러웠다. 끝나버린 그 자리를 무엇이 차지하고 있을지도 궁금했다.

p. 177
그들은 해가 낮아질 때까지 지붕에서 옛날얘기를 주고받았다. 돌아보면 그때가 참 좋았다. 아무리 가난하고 비루한 과거라도 과거는 늘 현재나 미래보다 나았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좋은 일은 좋은 채로 나쁜 일은 지나가버렸기에. 그것은 사직서를 제출하던 날 무수히 많은 장소 가운데 그녀의 발길이 이곳으로 향한 이유와도 같은 것이었다.

p.178
시내 갈 일이 당분간 안 생기도록 잔뜩 샀더니 봉지가 꽤 무거웠다. 어제처럼 어두웠지만 풀이 말끔히 제거된 집은 어제만큼 무섭지는 않았다. 그저 익숙한 느낌이었다. 그녀는 인간에게 익숙삼이란 감정이 없거나 약하다면 어떻게 될까 상상했다. 금방 좌절하거나 쉽게 포기 못 하거나, 아마 그렇게 될 것이다.

p.202
현수는 이름이 평범하고 흔해 빠져서 기억나지 않는다는 투로 말했고 무심하게 짓는 표정도 그러했다 특이한 이름을 가지면 인생이 특별해지고 사람들에게 특별하게 기억될 수 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일생에서 기억할 게 이름뿐인 건 아니지 않나. 그런 게 전부가 될 수는 없지 않나. 동기인데도 현수가 그녀를 기억 못 하자 나는 잠시 그녀가 정말 없었던 사람인가, 하는 ’서늘한‘ 생각에 잠겼다.

p.242
강씨는 귓속에 물이 차 있었다면 잠에서 깨지 않았을뿐더러 지금 이 대화와 송 군의 슬픔도 그냥 지나쳤을 텐데,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낡고 초라한 골방 혼자 감당하기엔 울음소리가 너무 컸다. 때론 들리거나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슬픔은 약해질 수 있었다. 누군가의 슬픔은 타인의 귓속에서 부서질 수 있었으므로.

p. 284
강 씨는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려 오늘의 마지막 열차가 떠난 구부러진 철길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무엇이 됐든 떠난 자리에는 고요와 고독만 남는 것 같다고 강 씨는 생각했다. 건널목을 지키면서 수없이 많은 열차를 떠나보냈지만 그 뒤에 찾아오는 허전함은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것은 삶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가벼운 점심>, 장은진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QuapK